잠비아 자원개발/아프리카 잠비아

잠비아역사

강철2 2011. 12. 3. 04:09

지금까지 발굴된 고고학 자료에 따르면 100만∼200만 년에 현재의 잠비아 지역을 원시인들이 배회하고 있었다. 석기시대의 유적과 인공물 또한 많은 지역에서 발견되고 있으며, 약 2,000년 전에는 초기 철기시대의 종족들이 이 지역에 정착하여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길렀다. 현대의 통가족의 선조들은 약 2,000년 전에 이 지역에 당도했지만, 다른 현대 종족들은 17, 18세기에 이르러서야 콩고 민주공화국과 앙골라로부터 이곳으로 들어왔다.

1798년 므웨루 호(湖) 부근에 포르투갈의 교역소가 설치된 데 이어 1835년에는 반투어족에 속하는 응고니족이 니아사 호와 루앙과 강이 분기하는 지점에 정착했으며, 수토족과 콜롤로족(마콜롤로족)은 잠베지 강 상류를 건너 바로첼란드를 점거했다. 스코틀랜드의 선교사 데이비드 리빙스턴은 1851년 잠베지 강 상류에 도달했고, 1855년에 빅토리아 폭포를 발견했으며, 이어 잠베지 강 유역 전체와 탕가니카 호 이남의 고원을 탐험했다. 세실 로즈영국령 남아프리카회사의 사자(使者)들은 1890년대에 잠비아의 추장들 대부분과 조약을 맺었다(→ 색인 : 대영제국). 영국령 남아프리카회사는 이 지역을 1924년 영국의 보호령이 될 때까지 관리했다. 1911년에 이 영토는 북(北)로디지아로 알려졌으며, 당시 약 1,500명의 유럽인이 정착하고 있었다.

광업 개발은 20세기초에 시작되었다. 구리대가 개발되기 시작한 1924년까지 북로디지아에는 약 4,000명의 유럽인이 있었다. 영국 남아프리카회사는 1924∼ 60년에 채광권을 보유하여 막대한 이익을 얻었다. 1935년 수도가 리빙스턴에서 루사카로 이전되었다. 20세기초에는 아프리카인이 정치권력구조에 거의 참여하지 못했지만, 1930년 이후에는 사정이 바뀌기 시작하여 그들의 정권 참여가 확대되었다. 1950년대초에는 UNIP와 아프리카 민족회의(African National Congress/ANC)에 의해 민족주의 운동이 시작되었다. 1952년까지는 유럽인의 인구가 약 4만 3,000명으로 불어났으며, 그들은 대부분 코퍼벨트 주에 거주했다.

1953년 북로디지아는 내부의 강력한 반대를 무릅쓰고 니아살란드(말라위) 및 남로디지아와 연합하여 중앙 아프리카, 로디지아, 니아살란드 연방을 결성했다. 이 연방은 1963년에 해체되고 이듬해에 이 나라는 영연방 내의 잠비아 공화국으로 독립을 획득했으며, UNIP가 집권당이 되고 케네스 카운다가 대통령이 되었다. 카운다는 1980년대까지 잠비아의 정치를 좌우하는 인물로 군림했다. 1969년에 그는 상공업의 국유화 정책에 착수했는데, 이 정책은 구리 산업으로 시작하여 토지 소유, 영화, 신문, 연초공장과 임대주택에까지 확대되었다. 그는 또한 1973년 새 헌법으로 UNIP의 일당 지배를 굳건히 했으며, 로디지아의 다수결 원리와 더불어 앙골라와 모잠비크의 독립에 관한 논의에 참여하여 이 나라의 외교정책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잠비아의 경제는 1965년 인접국 로디지아에 대한 제재가 시작되면서 타격을 받기 시작했으며, 세계의 구리 가격이 떨어지기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구리 수출에 더욱 의존함으로써 1970년대 내내 침체를 벗어나지 못했다. 옥수수와 그밖의 곡물생산도 1970, 1980년대초에 감소했으며, 그 감소의 폭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많은 농부가 이 나라를 떠난 후에 특히 커졌다. 1970년대 내내 잠비아는 앙골라, 모잠비크, 남아프리카 공화국, 로디지아(지금의 짐바브웨) 정부를 상대로 전쟁을 벌였던 게릴라들의 도피처가 되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제외한 이들 나라에서의 독립과 다수결 원리가 1980년대초에 이 문제를 완화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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